필자는 각종 다양한 어려움 가운데 있는 학생들이 모인 산골짜기 대안학교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사회는 우리 학생들을 품위있게는 부적응 청소년이라고 불렀고, 쉽게는 문제아라고 불렀다. 그 외에도 수많은 용어들이 있다. 날라리, X아치, 비행청소년, 등등. 우리는 이런 학생들과 함께 학교 안에서 함께 먹고 자고 공부하며 살았다.

그러다보니 다른 학교에서는 1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사건 사고들이 거의 매일 터지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었다.

한번은 필자와 평소 친분이 있던 J신문의 기자가 와서 우리학교를 취재하고 갔다. 그는 우리의 교육철학과 교육방침에 매우 호의적이었기에, 긍정적인 시각으로 우리 학교에 대하여 호의적인 기사를 썼다. 그런데 무심코 뽑은 기사의 제목이 문제를 일으켰다.

문제아들의 학교, OO고등학교

처음으로 언론에 자신들의 학교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고 들떠있던 학생들이 신문을 보고서는 흥분해서 내게 와서 따지기 시작했다.

왜 우리가 문제아에요!

대답할 말이 난감했다. 속으로는 너희 같은 놈들이 문제아가 아니면, 대한민국에 누가 문제아냐! 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그 말을 차마 입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무심코 이렇게 대답하게 되었다.

문제아면 좀 어떠니, 뭐~ 모범생 중에 큰인물 있니?

이렇게 말하고 대충 그 자리를 빠져나오면서, 방금 전에 내 자신이 했던 말을 되뇌어 보았다. 모범생 중에 큰 인물 있나?라고 아무리 되물어 보아도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그러나 그 반대로 그럼 문제아 중에 큰 인물이 있나?라고 자문하는 순간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들이 쉽게 흘러나왔다. 에디슨, 아인슈타인, 성 프란체스코, 그래서 자리에 앉아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왜 문제아 중에는 큰 인물이 많은데, 모범생 중에는 큰 인물이 별로 없는 것일까?

오랜 시간동안 이 질문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무릎을 치면서 나름대로의 해답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람마다 큰 그릇이 있고 작은 그릇이 있듯이, 학교도 큰 그릇작은 그릇이 있다. 학교보다 작은 그릇의 학생이 들어오면, 그 학생은 거의 있는 듯 마는 듯 하게된다. 있어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하고, 없어도 누구 하나 별 관심을 안갖게 된다. 이런 학생은 별로 용기도 에너지도 없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지도 못한다.

그럼 학교의 그릇과 딱 맞는 사이즈의 그릇을 가진 학생이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가? 이럴 때 많은 선생님들은 그 학생을 좋아하고 칭찬하면서, 그의 부모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머니, 어쩜 이렇게 아이를 바르게 키우셨어요. 이 아이는 정말 우리 학교에 딱 맞고 모범적이네요…”

그런데 학교보다 훨씬 큰 그릇을 가진 학생이 입학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학교는 그 학생을 감당도 못하고 이해도 못하게 되어 그 아이의 부모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게된다. 어머니, 저희는 이 애를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정말 문제가 많습니다.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그릇의 크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이전에, 학생에게 모든 문제가 있다고 단정지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모든 문제아가 큰 그릇이다 또는 모든 모범생들은 평범한 그릇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모든 문제아들을 옹호하거나, 모든 모범생들보고 문제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우리가 문제아라고 단정지어버리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우리 기성세대의 시각을 바꿔볼 필요가 있지 않는가 !

를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문제아라고 생각하는 아이들 중에는, 위대한 위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큰 그릇들이 정말로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문제아들 중에는, 소심하고 배포가 없거나 절제력이 부족해서 문제아가 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다른 문제아 친구들에게 자신이 범생이로 비춰지는 것이 창피하기 때문에 스스로 문제아가 되거나, 어떤 내적 욕구를 절제하지 못해서 그렇게 되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아닌, 미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정말로 보석 같은 아이들을 우리가 하찮고 더러운 돌멩이나 쓰레기 취급을 하고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문제아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다음과 같은 몇가지 공통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1. 머리가 좋고 지능이 뛰어나다.

2. 분출될 수 밖에 없는 내적인 에너지가 꿈틀거린다.

3. 대세를 거스를 수 있는 배포나 용기?가 있다.

, 머리가 비상하지 않거나, 내적인 에너지가 없거나, 용기라고 부를 수 있는 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기성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틀을 거스를 수 있는 배포가 있지 않으면 문제를 일으키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긍정적인 요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다면적인 내적 요소들의 결여나 왜곡으로 인해서 비뚤어진 방향으로 그들의 행동이 분출되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들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비뚤어진 방향을 바른 방향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이들의 잠재된 능력이 바르게 발휘되고, 그들의 큰 그릇이 그릇답게 발현될 것이다.

예전에 고등학생 신분으로서 교내의 종교 자유를 외치며 1인시위를 해서 끝내 승리했던 K군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학생은 고3의 대부분의 시간을 시위와 단식으로 일관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합격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주장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가 큰 그릇이라라고 말하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 후, K군의 기사가 심심치 않게 신문지면을 장식하는 것을 보았고, 그 기사의 대부분은 그의 삶이 점점 파괴되어 가고 있는 느낌을 주었다.

K군을 바라보며 필자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그가 대한민국 최고의 학부를 다니면서도 참된 스승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K군보다 큰 그릇을 가지고 그를 품어서 그의 능력과 에너지가 참으로 사회를 아름답게 하고 사람들을 유익하는데 쓰이도록 하거나, 비록 K군보다 그릇은 작다 하더라도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겸손과 사랑으로 그를 지도할 수 있는 그런 겸손과 사랑의 스승을 못 만났다는 것이다. 최근 그의 삶을 바라볼 때, 그의 삶과 시위의 동기가 아직도 사랑과 겸손보다는 증오와 교만인 것으로 보이는 것은 필자만의 착각일까?

필자가 근무했던 산골짜기 학교는 3가지의 매우 특이한 입학요건을 가지고 있었다.

1. 중학교 성적이 중하위권일 것.

2. 살면서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이 있어야 할 것.

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자하는 의지와 결단이 있을 것.

이 세가지 입학요건을 한가지로 요약한다면,

정말 큰 그릇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보다 작은 그릇의 학교에서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 스스로를 하찮은 존재로 착각하고 사는 학생들

일 것이다. 사람은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크게 되기 어렵고, 또한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일어서서 해보겠다는 것은 큰 그릇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지금 되돌아 보면, 우리는 이런 학생들을 데려다가 정말 그들의 그릇의 크기만큼 키움으로써 청출어람이 계속 일어나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 우리의 꿈이었던 것 같다.

한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후대로 갈수록 그들 개인의 그릇이 커야 한다. 그러려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보다 큰 그릇을 가진 학생들을 (그들이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사랑과 겸손으로 키울줄 아는 교사들이 필수적이다. 어쩌면 그런 교사들은 이미 더 큰 그릇일지도 모른다. 이런 교사가 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 기성세대의 책임이요 의무일 것이다.

중학생 딸을 둔 한 어머니가 언젠가 필자에게 이야기 했다.

선생님, 상담할 것이 있어요 이거 원 창피해서 중2짜리 우리 딸이 가출을 했는데요 문제는 혼자가 아니고 반애들 10명을 데리고 다같이 가출을 했대요…”

필자는 그 어머니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다.

우와 어머니 놀랍네요 어머니 마음은 상하셨겠지만 어머님 딸은 놀라운 리더십을 가진 학생입니다. 반애들 10명을 데리고 가출을 했다면, 가출청소년 100명을 데리고 돌아올 수 있는 아이입니다.

Posted by 퓨전마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