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CoverStory] '갑'들의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乙 생활백서
[중앙일보 2007-11-02 08:18]
[중앙일보 홍주연.이영희.권혁재]

  “당신은 ‘갑’입니까, ‘을’입니까.”

 week&이 30대 이상 남녀 직장인 1000명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서 갑·을은 비즈니스 세계에서 쓰는 말입니다. 돈을 내고 서비스나 제품을 사는 쪽이 갑, 이를 판매하는 쪽이 을로 불립니다. 갑의 횡포에 설움 받는 을의 체험담은 어느 직장에나 전설처럼 내려오지요. 똑똑 낙엽 떨어지는 요즘, 을이라 더 서럽다고요? week&이 을의 좌충우돌 체험담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을이기에 가지게 된 경쟁력도 취재했고요. 설문조사 결과를 보니 전체 직장인의 20%는 갑, 그 두 배가 넘는 45%가 을이더군요.


글=홍주연·이영희 기자 jdream@joongang.co.kr 그림=강주배 작가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대학원 숙제에 보모 역할도

을은 바쁘다. 갑의 전화 한 통에 일년 365일, 24시간을 울고 웃는다. 대기업 영업직에서 일하는 홍모(33)대리는 얼마 전 한밤중에 경춘국도를 달려야 했다. 밤 11시에 고객 회사 직원이 “춘천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고 전화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오니 새벽 3시였어요. 우리 제품을 사준다는 보장은 없지만 일단 무조건 잘 보여야하니까요.”

 국내 제약회사에 다니는 양모(29) 주임의 주말은 빡빡하다. 약국을 상대로 영업하는 그는 주말마다 약사 자녀들을 데리고 놀이동산이나 공원에 간다. 약사 자녀가 해외연수를 떠나면 공항에 데려다 주기도 한다. 약국에서 유리창 닦고 쓰레기 버리는 것은 일상에 가깝다. “비굴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고객에게 좀 더 나은 서비스를 한다고 보면 돼요.”

 광고대행사에서 AE로 일하는 이모(33)씨도 업무 외 일에 시간을 쓰긴 마찬가지다. 고객 회사 직원의 대학원 과제를 해주거나 중학생 자녀의 숙제를 대신 하는 일이 많다. 무리한 술접대 요구도 종종 있다. 그는 “여자 AE들은 접대 중 성적 농담이나 신체 접촉에 시달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서비스 업체 임원인 김모(45)씨는 “가끔 내가 술집 아가씨 같다고 느낀다”고 말한다.
“술자리에서 30대 초반 직원이 반말을 해도 꾹꾹 참아요. 하루 밤에 술값으로 1000만원을 바가지 쓴 적도 있고요.” 홍보대행사에서 일하는 이모(34)씨는 자신을 ‘병’이라고 칭한다. “갑 아래 을, 그 밑에 병이죠. 갑에게 당한 대로 화풀이하는 을을 상대하는 것도 만만치 않아요.”



뛰는 갑 위에 나는 을

모든 을이 다 서러운 것은 아니다. 힘센 을도 있다. 회계사 김모(33)씨가 그런 경우다. 돈을 받고 서비스 하지만 회계감사라는 업무 특성 때문에 접대를 받는 경우가 많다. 김씨는 “갑 회사 직원들이 ‘야동(야한 동영상)’ CD를 구해 주거나 돈봉투를 주머니에 몰래 넣어주기도 해요. 밥먹는 동안 갑 회사에서 차 시트를 전부 가죽으로 바꿔놓은 적도 있어요”라고 전한다.

 수요가 공급보다 많을 때도 을은 힘을 얻는다. 철강회사에서 영업을 하는 유모(45)씨는 갑의 구애를 받는 을이다. “제때 좋은 제품을 공급해 달라며 밥과 술을 사는 거래처 직원들이 많아요. 명절 때 선물을 들고 ‘을 관리’에 나서는 사람도 있어요.” 유씨의 말이다. IT업체 영업과장인 전모(35)씨도 ‘수퍼 을’이다. 소프트웨어를 판매하는 전씨의 회사는 시장의 절반 이상을 장악한 1위 업체다. 판매 가격도 을이 결정한다. 전씨는 “갑이 만나달라고 연락해도 튕긴다. 돈을 받는 쪽이 아니라 아쉬운 쪽이 을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갑-을 관계 속에서 인간적 친분을 쌓는 일도 많다. 유통업체에서 일하는 김모(40) 과장은 휴대전화에 100명 넘는 갑의 전화번호가 입력되어 있다. 고객 회사 직원과 부부 동반으로 공연을 보거나 친목 모임도 갖는다. 그는 “갑과 을은 철저한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라 오히려 더 편하다. 서로 경쟁할 일도 없고 공생이 가능하기 때문에 회사 동료보다 더 친하게 지낸다”고 말했다. 게다가 업무에 도움까지 되니 일석이조라는 설명이다.


"생존력 강한 을만 뽑겠다”

올 초 중소기업을 차린 이모(47)씨는 직원을 채용할 때 원칙을 세웠다. ‘을 경력이 있는 사람만 뽑겠다’는 것이다. 대기업 영업직에서 10년 동안 일한 이씨는 누구보다 을의 경쟁력을 크게 평가한다. “안 되는 일도 되게 만들죠. 남에게 고개 숙일 줄 알죠. 생존력 강하죠. 그런 인재를 마다하는 사람 있겠어요.”

 사업을 하는 박모(46)씨의 별명은 ‘을의 달인’이다. 광고대행사 AE 시절부터 을로 사는 법이 몸에 배었다. 택시 문을 열어 주는 것은 기본. 술자리가 2·3차로 이어지면 자신은 돈만 내고 슬쩍 빠진다. 자진해서 고객 자녀의 학원을 알아보고 휴가지를 물색한다. 그가 주선한 소개팅으로 결혼에 골인한 갑도 여러 명이다. 그는 을로써 만든 인맥을 바탕으로 최근 광고회사를 차렸다.

 전문가들은 을의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말했다. 변화경영연구소 구본형 소장은 “을은 갑의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하고 변화에 능동적”이라며 “갑의 위치에 있더라도 언제든 상황이 역전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삼성경제연구소 태원유 수석연구원은 “갑·을로 표현되던 비즈니스 관계가 점점 수평적 파트너 형태로 변하고 있다. 갑·을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전문성과 시장 가치를 높인 사람들이 더 인정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밤낮 없이‘갑’연구했어요
오피스 플러스 이순례 부사장

 “마실 것 좀 드릴까요?” 라는 말과 함께 기자 앞에 음료수 두 잔이 나란히 놓인다.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커피와 주스 두 잔을 미리 준비했단다. 기업용품 통합구매 대행사인 ‘오피스 플러스’의 이순례(36) 부사장, 사무실을 오가며 직접 손님을 챙기는 모습이 분주하다. 과장되지 않은 친절과 배려는 10여 년간 영업을 하며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습관이다.

 1996년 모나미광고팀 디자이너로 입사해 1년 뒤 기업 구매 대행 사업을 하는 신사업팀으로 발령을 받았다. 디자인보다는 발로 뛰는 일이 좋아 제품 카탈로그를 들고 기업 총무부를 찾아다니는 일부터 시작했다. 처음 문구류에서 시작한 구매 대행 사업은 이제 식품·컴퓨터·제지류 등 기업의 소모품 전반으로 확장됐다. 사업 초기부터 하나 둘씩 개척한 거래처가 이젠 연간 6만5000개에 달한다. 초고속 승진을 해 현재 모나미의 자회사인 ‘오피스 플러스’의 부사장 겸 사업총괄부장을 맡고 있다.

 “영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제품을 파는 ‘을’로서 ‘갑’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어요. 그냥 눈도장만 열심히 찍었죠.” 시간이 지나면서 ‘선택받는 을’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예를 들어 갑이 ‘컴퓨터 30대 견적을 내라’고 요구할 경우, 단순히 싼 컴퓨터를 찾는 게 아니라 왜 30대인지, 누가 사용자인지 등 파악해야 할 게 무궁무진해요.” 밤낮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거래처에 대한 공부에 매달렸다. 스스로도 “27세에서 35세까지는 오로지 일한 기억밖에 없다”고 회상할 정도다.

 기업의 구매 담당자가 남자일 경우 여자라서 유리한 점도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사업 이야기로 들어가면 여자라는 게 오히려 방해가 됐다. “농담이나 인사는 잘 받아주죠. 그런데 제가 구매 대행 서비스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하면 ‘네가 뭘 아느냐’며 무시하는 분도 많았어요.” 평소에는 그토록 살갑던 ‘갑’들이 막상 구매할 땐 경쟁사를 택하는 데 상처를 받기도 했다. ‘갑과 을’ 관계에서 인간적인 정에만 의존하면 안 된다는 것, 여자이기 때문에 더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영업맨 중에는 자신이 ‘을’의 입장에 있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뭔가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아요. 상대방이 어려운 요구를 할수록, 그에 부응하기 위해 나는 더욱 성장하죠.” 30대 중반에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부족한 외국어 실력을 쌓기 위해 조만간 유학을 떠날 계획도 갖고 있다. “나를 채찍질하는 과정이 즐거워요. 언제까지나 갑에게 선택받을 수 있는 ‘경쟁력 있는 을’로 남고 싶습니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strong 이순례 부사장의 ‘을로 성공하는 5원칙’ /strong 1. 나를 세일즈할 수 있는 경쟁력을 키워라.

2. 나의 경쟁력을 사 준 갑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라.

3. 업무 관계 외에 인간적인 유대, 존중이 필요하다.

4. 그러나 인간적인 유대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5. 갑의 요구에 한발 앞서는 창조적인 콘텐트를 가져라.




매달리는 대신 찾아오게 만들죠
PCG 여준영 대표

 홍보·마케팅 회사 PCG 여준영(37) 대표는 “나는 을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2000년 창업한 회사를 계열사 6개, 직원 150여 명의 회사로 키워 냈지만 다른 기업에서 일감을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 을이 아니라니, 의아했다. 그는 “일감을 달라고 매달리는 입장이 되면 이 업계에서 성공할 수 없다. 갑처럼 생각하고 일하려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여 대표는 흔히 말하는 ‘을 타입’과 거리가 멀다. 스스로 “대인기피증 수준”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사람 만나는 것에 소극적이다. 고객에게 전화를 돌리는 일도 없고 술·골프 접대에 나서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 약속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을 정도다. 그런데도 회사를 성공시킨 비결은 간단하다. 돈 받은 만큼 일한다는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창업 초기에 고객에게 받은 돈을 돌려준 적도 있었다. 자신의 서비스가 그만한 가치가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기업에서 ‘갑’으로 일했던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을도 여러 유형이 있죠. 시킨 것만 하는 ‘머슴형’, 아이디어가 없는 ‘무뇌형’, 고무줄 견적으로 장난치는 ‘뺀질이형’….절대로 이렇게 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참여한 100여 개의 경쟁 입찰에서 진 적이 없다. “입찰 전, 일주일은 철저히 갑처럼 생각합니다. 그 다음 일주일은 소비자 입장에서 살죠. 그러면 어떤 부분을 공략할지 보이더라고요.” 누구보다 일도 열심히 했다. 접대할 시간에 밤 새워 일했고 주말에도 좀처럼 쉬어 본 적이 없다. 그는 “사장이 열심히 하니 직원들도 따라오더라”고 말했다.

 여 대표는 올 초 딴살림을 차렸다. 경영은 다른 사람 손에 맡기고 본인은 ‘1인 기업’으로 변신했다. 부하 직원 없이 혼자서 기업의 마케팅·홍보 전략을 컨설팅한다. 이전보다 ‘튕기는’ 일도 많아졌다. 고객이 여 대표의 사무실로 찾아와야 만나 주고, 업계의 관행인 제안서도 쓰지 않는다. “내 이름을 믿고 맡기라는 거죠. 차별된 서비스를 제공할 때 을도 목소리를 높일 수 있습니다. 제 이름이 브랜드가 되는 것, 그 것이 제 꿈입니다.”


홍주연 기자 jdream@joongang.co.kr


strong 여준영 대표의 ‘을로 성공하는 5원칙’ /strong 1.‘yes man’ 과 ‘say no’의 중도를 걸어라. 고객의 의견은 존중하면서 잘못된 것은 과감히 지적하라.

2.갑처럼 돈을 써라. 고객의 예산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쓸 데 없는 돈을 주겠다면 사양해라.

3.잠재 고객보다 현재 고객이 더 소중하다. 다른 회사가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한다고 현재 고객에게 소홀하면 안 된다.

4.고객에게 투자하라. 돈을 많이 주는 고객보다 기회를 주는 고객에게 투자하라. 그 경험이 나중에 돈이 된다.

5.돈값을 해라. 받은 만큼 일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다. 고객에게 돈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하라.
Posted by 퓨전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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